[6월 우룡스님 편]
작성자
전국비구니회
작성일
2019-05-31 23:30
조회
1127
“수행의 장애와 극복 방법”
번뇌라는 훼방꾼
요즈음 들어 많은 불자들은 단순한 기복신앙에서 벗어나 실천불교 · 수행불교 속으로 몰입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돕는 이타행(利他行)에서부터, 참선하고 염불하고 기도하고 경전을 외우는 등의 마음 닦는 공부를 하면서 깨달음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바람직하고 자랑스러운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스님들만이 아니라 재가불자들도 마음공부를 할 때 나타나게 되는 장애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장애를 잘 알아야 공부를 방해하는 마(魔)를 능히 극복할 수 있고 참으로 공부를 잘 성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공부, 깨달음의 공부를 할 때 나타나는 각종 장애를 불교에서는 ‘마’, ‘마구니’ 또는 ‘마장(魔障)’이라고 합니다.
예부터 불교에서는 이 마를 3마 · 4마 · 8마 · 10마 등으로 설명하였고, 『능엄경』에서는 ‘50종변마사(五十種辨魔事)’라 하여 공부를 할 때 나타나는 50가지 마구니의 길을 아주 상세하게 설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이 마를 ‘훼방꾼’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풀어 보고자 합니다.
공부를 방해하는 훼방꾼은 거의 대부분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이 훼방꾼에는 ① 표면적인 훼방꾼과 ② 심각한 훼방꾼의 두 종류가 있습니다.
수행의 표면적인 훼방꾼으로는 우리가 수시로 일으키는 번뇌망상을 비롯하여 공부를 할 때 자꾸만 생겨나는 의심, 게으름, 쓸데없는 생각 등이 모두 포합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기도를 하거나 참선 · 독경 · 사경을 하고 있으면, 평소와는 달리 마음이 이곳저곳으로 계속 돌아다니고 있음을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와는 달리 번뇌도 참으로 많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초보자들은 이러한 번뇌 때문에 공부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럼 평소에는 돌아다니지 않던 마음이 참선이나 기도를 하기 때문에 돌아다니기 시작하는 것인가? 평소에는 일어나지 않던 번뇌가 기도나 참선 · 사경 · 독경을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인가?
절대로 아닙니다. 평소에도 돌아다니고 있었고 번뇌가 많이 일어났지만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기도나 참선 · 사경 · 독경을 하여 마음이 조금 맑아졌기 때문에 평소에 별로 보이지 않던 것이 잘 보이게 된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훼방꾼은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 마음을 단속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늘 찾아듭니다.
왜냐하면, 의식적인 우리의 일상생활이 파도 따라 움직이는 삶인 데 비해, 기도나 참선 · 사경 · 독경 등의 마음공부를 하는 생활은 파도를 잠재우는 행위이기 때문에, 변화의 과정에서 평소의 버릇들이 번뇌라는 훼방꾼이 되어 또렷이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번뇌가 잘 느껴지고 돌아다니는 마음이 잘 보인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가 만들어 낸 마구니가 잘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 번뇌 망상들이 큰 문젯거리인가? 아닙니다. 극복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한 가지만 주의하면 됩니다.
그 한 가지란, 돌아다니는 마음이나 번뇌를 없애려고 노력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없애려고 노력을 하면 훼방꾼이 내민 갈고리에 걸리는 꼴이 되어 애를 먹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와 같은 초기 단계의 훼방꾼은 세력을 형성하고 있지 않은 떠돌이이므로, 일어나는 번뇌를 무심하게 바라보면서 원력을 굳건히 하고 마음을 잘 단속하면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네가 중국을 가든 일본을 가든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관세음보살 염불만 하겠다.(화두만 하겠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으면서 기도 · 참선 · 사경 · 독경 등에 집중을 하게 되면 번뇌의 마구니들은 저절로 없어집니다.
기도를 하다가 번뇌가 일어나고 마음이 동할지라도, 그 번뇌에 상관하지 않고 하던 기도를 열심히 계속하게 되면, 그냥 돌아다니던 그 번뇌란 놈이 스스로 미안했다는 듯이 기도와 함께합니다. 마치 ‘나도 기도를 해야겠다’고 결심이나 한 듯이, 돌아다니던 마음이 도로 기도 속으로 녹아들어 오는 것입니다.
심각한 훼방꾼
이러한 가벼운 훼방꾼에 비해, 어느 정도 공부가 익어갈 때 등장하는 힘쎈 훼방꾼이 있습니다. 곧 지금 생활하고 있는 의식 속의 번뇌가 아니라, 나의 잠재의식 · 무의식 속에 숨겨져 있던 무명업(無明業)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한번 되새겨 보십시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낯선 고장을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거리의 모습이나 풍경이 언제가 와 본 듯이 생생하고, 10년 · 20년 후에까지 기억이 나는 경우를 경험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잠재적인 기억능력입니다.
그렇지만 이 능력을 평소에 늘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파도 따라 출렁이는 고된 삶을 살다 보면 전생의 일은 물론이요 현생에서의 즐거웠던 일, 슬펐던 일, 두려웠던 일들이 차츰 잊혀집니다. 그리고 특별한 감정들은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 속에 깊이 간직됩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거나 참선 · 사경 · 독경 등의 공부를 하여 출렁이던 파도가 잦아들면 마음이 차츰 맑아지는데, 이때 잠재의식이나 무의식 속에 간직되어 있던 무명업이라는 훼방꾼이 깨달음의 공부를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모습을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곧 기도나 참선의 시작단계가 아니라, 기도를 한다면 사소한 게으름이나 일상적인 번뇌의 단계를 넘어서서 기도의 힘이 쌓이기 시작할 때, 참선을 한다면 어느 정도 화두가 잘 들린다고 생각될 때쯤 찾아들게 되는 훼방꾼입니다.
일반적으로 자주 나타나는 훼방꾼으로는 기쁨〔喜〕 · 슬픔〔悲〕 · 두려움〔怖〕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훼방꾼은 모든 공부인에게 다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훼방꾼들이 나에게 나타나지 않을까’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그 내용을 알고 있으면 혹 이러한 훼방꾼이 나타날 때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기쁨의 훼방꾼〔喜魔〕은 계속 터져 나오는 웃음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쁨에 젖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 기쁨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왠지 모르게 하염없이 기쁘고 좋습니다. 마냥 싱글벙글 웃으며 정진하고 웃으며 생활합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자의적인 웃음이 아닙니다.
누가 좋지 않은 일을 당하여 잔뜩 찌푸려 있을 때도 옆에서 마냥 웃습니다. 그야말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이를 보고 누군가가 꾸짖으면 입으로는 ‘잘못했습니다.’ 하면서 계속 싱글벙글 웃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쁨과 웃음’이 함께 하는 것이 어째서 훼방꾼이냐고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깨달음의 법열(法悅)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잔잔한 기쁨이 아니라 잠재의식과 무의식의 창고에 감추어져 있던 웃음보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과도 같아서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곧 자제력 없는 웃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의 훼방꾼보다 더한 것은 슬픔의 훼방꾼〔悲魔〕입니다.
☞ ♣ ☜
동산(東山, 1890~1964)큰스님께서 부산 범어사의 조실로 계실 때 선방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수십 명의 스님이 열심히 좌선정진을 하고 있는데, 한 스님이 한쪽 발끝으로 바닥을 짚고 서서 찡얼찡얼 울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주변 스님들이 그의 몸을 흔들자 정신을 차리며 소리쳤습니다.
“어? 그 많던 사람들이 모두 어디로 갔지?”
자세한 까닭을 묻자 그 스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이 무엇고’ 화두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위의 사람들이 2~3㎜ 크기의 불개미처럼 조그맣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자 수천수만 명이나 되는 조그마한 사람드이 불개미 떼처럼 제 곁으로 몰려드는데, 옷자락으로라도 건드리면 터져 죽을 것만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들에게 옷이 닿지 않게 하기 위해 옷을 추슬러도 보았지만, 차츰 무릎 밑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그들이 눌려 죽을 것만 같아 발로 바닥을 딛고 쪼그리고 앉았더니, 발바닥 밑으로 파고드는 것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저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차츰 발뒤꿈치를 들었다가 나중에는 한쪽 발로만 서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작은 사람들은 계속 모여들었고 옷을 붙들고 매달리며 올라오고 있었으니···.
제가 조금만 움직여도 눌려 죽을 것만 같은 그 사람들이 너무도 불쌍하고 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 § ☜
이렇게, 슬픔의 훼방꾼에게 사로잡히면 자꾸만 울게 됩니다. 사람을 만나도 울고, 혼자 있으면서 울고, 절하면서 참선하면서 계속 눈물을 흘립니다. 까닭도 없이 자꾸 눈물을 흘립니다. 뚜렷한 참회의 눈물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눈물이요 슬픔인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의 정진을 가로막는 두려운 훼방꾼〔怖魔〕이 등장하면 한동안 우리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이 두려움의 훼방꾼에게 걸리면 기도를 하는 법당으로 들어가기가 싫어집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기도를 멈추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현상이 벌어지는가 하면, 심하게는 목탁을 치며 기도를 하고 있는 ‘나’에게 느닷없이 큰 몽둥이를 든 사람이 나타나 두드려 패는 듯한 두려움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매우 심한 두려움에 휩싸이는 경우에는 ‘머리끝이 쭈뼛한’ 정도가 아닙니다. 머리털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의 털 하나하나에 한 사람씩 붙어 한 사람씩 잡아당기는 듯한 공포에 휩싸입니다. 그야말로 ‘몸뚱어리가 딱 얼어붙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상과 같은 기쁨 · 슬픔 · 두려움의 훼방꾼이 등장하는 것은 무의식 ·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던 무명업력이 표출되면서 업들이 녹아내린다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훼방꾼의 나타남은 수행을 잘하고 있다는 증거요 수행이 잘 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훼방꾼들이 나타나더라도 당황해하지 마십시오. 여기에 속지도 말고 흔들리지도 말고 기도 · 참선 · 사경 · 독경을 더욱 열심히 하십시오.
기도를 하는 사람이라면 기쁨도 슬픔도 두려움도 그리고 어떠한 감정과도 벗하지 말고 계속하던 기도에 집중하면 되고, 화두를 드는 사람은 화두만 밀고 나가면 모든 훼방꾼은 스스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옛 말씀에 “도가 깊어지면 마도 성해진다.〔道高魔盛〕”고 하였듯이,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훼방꾼이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도가 깊어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곧 의식의 세계보다는 더 깊은 잠재의식과 무의식에 감추어져 있던 응어리가 녹아내리는 기회요 고비로 알고, 스스로가 세운 서원(誓願)에 따라 흔들림 없이 정진해야 합니다.
속기 쉬운 순경계의 훼방꾼
수행을 방해하는 훼방꾼 중에는 싫고 맞지 않는 역경계(逆境界)의 훼방꾼도 있고, 아주 좋고 끌리는 순경계(順境界)의 훼방꾼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훼방꾼 중에서 보다 극복하기가 어려운 것은 순경계입니다.
역경계는 ‘나’에게 맞지 않고 괴로움을 주기 때문에 오히려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굳게 가지게 하지만, 순경계는 즐거움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극복하고자 하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순경계에 부딪히면 더욱 조심하고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실제로 ‘관세음보살’ 정근을 하거나 ‘천수다라니’를 열심히 외우다 보면 묘한 순경계를 접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정진을 하는데, 갑자기 관세음보살이 직접 화현하여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쁘다’, ‘잘났다’, ‘미인이다’라는 등의 이 세상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관세음보살이 나타납니다.
때로는 연꽃 위에 서서, 때로는 공중을 둥둥 떠다니는 연꽃을 타고, 때로는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기도하는 사람의 등을 톡톡 두드리며 속삭입니다.
“장하다, 정말 잘하는구나.”
때로는 이마를 어루만져주며 인정을 해줍니다.
“네가 그토록 나의 이름을 열심히 불렀으니, 이제 깨달음의 눈을 주리라. 기도는 그만하도록 해라.”
하지만 이 등장인물이 불보살이 아니라, 바로 ‘순경계의 훼방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순경계의 훼방꾼을 극복하지 못하고 정진을 그만두면 어떠한 업도 녹이지 못하고, 다시 업보중생의 자리로 돌아가 버립니다. 어떤 때는 더 나쁜 결과 속으로 굴러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아울러 기도나 참선 등의 수행을 꾸준히 하다 보면 광명이 계속 나타나기도 하고, 평소에 느껴 보지 못했던 신비한 경계가 눈앞에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앞날이 또렷이 보이기도 하고, 남의 운명이 그대로 비치기도 하며, 불보살님이 나타나 시험을 하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 ♣ ☜
6·25가 완전히 끝나기 몇 달 전인 1953년, 나는 보경사 서운암에서 능엄주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70일쯤 되었을 때부터 심한 장난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새벽녘이 되어 눈을 뜨면 ‘오늘 몇 시에 어디에 사는 누가 온다’라는 생각이 드는데, 정말 그때가 되면 그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며칠이 더 지나자 가만히 방에 앉아 이십 리 삼십 리 밖의 신도들 집이 다 보였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생각만 일으키면 눈앞에 있는 TV를 보듯이 동네의 모든 집이 보이고,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도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밥상 위의 반찬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가 낱낱이 보였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어떤 사람이 내 앞에 서면 그 사람의 몸이 마치 투명체처럼 다 들여다 보이고, 뼈 마디마디까지 그대로 보였습니다. 그 사람은 아직 아무것도 못 느끼고 있건만 병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까지 진행되었으며, 얼마 후면 어느 자리에서 어떻게 아픈 상태가 벌어진다는 것이 내 눈에는 다 읽혀졌습니다.
또 아픈 사람에게 내 생각대로 앞에 있는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주면서 ‘이것을 씹어서 잡수시라’든지, 잎을 따서 ‘이걸 달여 먹으면 낫는다’고 하면, 약도 아닌데 분명히 그 사람의 병이 낫는 것이었습니다.
이듬해가 되자 나는 덕숭산 정혜사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도를 깨달은 금봉(錦峰)스님께서 경험했던 일들을 자랑처럼 말씀드렸더니 대뜸 호통을 치셨습니다.
“이 마구니 새끼! 중노릇을 한 게 아니고 마구니 노릇을 했구나. 너같은 놈 살려 놓으면 여러 사람을 망쳐 놓는다. 당장 주문을 버리든지 이 자리에서 죽든지를 택해라.”
그날부터 스님께서는 일체 바깥 출입을 못하게 하셨고, 곁에 머물게 하시어 ‘아무것도 하지 말라’며 엄히 단속해주셨기에, 겨우 이 경계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 § ☜
이렇듯 기도 · 참선 · 사경 · 관행(觀行) 등을 닦다가 새로운 능력이 나타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기하고 흥미로운 이 경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는 수가 많습니다.
정녕 이때가 문제입니다. 이때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번뇌 때문에 일렁거리던 자기의 마음이 맑아져서, 이제까지는 비치지 않던 무엇인가가 비치는 것일 뿐, 아직은 완전히 맑아지고 밝아진 경지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때에 스스로의 자세를 더욱 가다듬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정녕 수행의 훼방꾼들을 잘 극복하려면 기도나 참선 중에 나타나는 순(順)과 역(逆)의 모든 경계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 어떠한 것도 마장(魔障)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임해야 합니다.
절대로 새로운 경지에 재미를 느끼지 마십시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정진 이외에는 모두가 아무것도 아니다. 무엇이 다가오든 내 알 바가 아니다. 모두 놓아 버리고 내 공부로 돌아가리라!’
진실로 이러한 자세로 정진해야 흔들림 없이 깨달음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물며 앞일이 보인다고 하여, 남의 운명이 비친다고 하여 재미를 느낀 데서야 어느 세월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겠습니까?
수행을 하다보면 고비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고비는 하나하나 넘겨야 합니다. 지금 넘어서지 못하면 다시 번뇌망상의 괴로운 삶 속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번뇌가 없는 원래의 깨달은 자리가 아니라, 끝없는 방황과 윤회의 삶 속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참으로 자신을 사랑한다면 얕거나 깊거나를 가릴 것 없이 다가서는 훼방꾼들을 극복하면서 부지런히 수행하십시오. 기도를 하든 참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경전공부를 하든, 삼매를 이루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할 때까지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삼매를 이루게 되면, 나고 죽음이 없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게 되고, 나고 죽음이 없음을 확실히 깨닫고 나면 이 세상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이 그대로 편안하고 행복한, 영원생명 · 무한광명이 가득 찬 세계로 바뀝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결코 훼방꾼이 아닙니다. 우리의 수행하는 자세입니다. 자세만 바르면 훼방꾼들은 오래 벗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어나는 번뇌망상과 고비 고비에 모습을 나타내는 각종 훼방꾼들이 우리를 출격대장부로 만들어준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부지런히 정진하시기를 두 손 모아 축원 드립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번뇌라는 훼방꾼
요즈음 들어 많은 불자들은 단순한 기복신앙에서 벗어나 실천불교 · 수행불교 속으로 몰입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돕는 이타행(利他行)에서부터, 참선하고 염불하고 기도하고 경전을 외우는 등의 마음 닦는 공부를 하면서 깨달음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바람직하고 자랑스러운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스님들만이 아니라 재가불자들도 마음공부를 할 때 나타나게 되는 장애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장애를 잘 알아야 공부를 방해하는 마(魔)를 능히 극복할 수 있고 참으로 공부를 잘 성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공부, 깨달음의 공부를 할 때 나타나는 각종 장애를 불교에서는 ‘마’, ‘마구니’ 또는 ‘마장(魔障)’이라고 합니다.
예부터 불교에서는 이 마를 3마 · 4마 · 8마 · 10마 등으로 설명하였고, 『능엄경』에서는 ‘50종변마사(五十種辨魔事)’라 하여 공부를 할 때 나타나는 50가지 마구니의 길을 아주 상세하게 설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이 마를 ‘훼방꾼’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풀어 보고자 합니다.
공부를 방해하는 훼방꾼은 거의 대부분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이 훼방꾼에는 ① 표면적인 훼방꾼과 ② 심각한 훼방꾼의 두 종류가 있습니다.
수행의 표면적인 훼방꾼으로는 우리가 수시로 일으키는 번뇌망상을 비롯하여 공부를 할 때 자꾸만 생겨나는 의심, 게으름, 쓸데없는 생각 등이 모두 포합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기도를 하거나 참선 · 독경 · 사경을 하고 있으면, 평소와는 달리 마음이 이곳저곳으로 계속 돌아다니고 있음을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와는 달리 번뇌도 참으로 많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초보자들은 이러한 번뇌 때문에 공부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럼 평소에는 돌아다니지 않던 마음이 참선이나 기도를 하기 때문에 돌아다니기 시작하는 것인가? 평소에는 일어나지 않던 번뇌가 기도나 참선 · 사경 · 독경을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인가?
절대로 아닙니다. 평소에도 돌아다니고 있었고 번뇌가 많이 일어났지만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기도나 참선 · 사경 · 독경을 하여 마음이 조금 맑아졌기 때문에 평소에 별로 보이지 않던 것이 잘 보이게 된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훼방꾼은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 마음을 단속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늘 찾아듭니다.
왜냐하면, 의식적인 우리의 일상생활이 파도 따라 움직이는 삶인 데 비해, 기도나 참선 · 사경 · 독경 등의 마음공부를 하는 생활은 파도를 잠재우는 행위이기 때문에, 변화의 과정에서 평소의 버릇들이 번뇌라는 훼방꾼이 되어 또렷이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번뇌가 잘 느껴지고 돌아다니는 마음이 잘 보인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가 만들어 낸 마구니가 잘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 번뇌 망상들이 큰 문젯거리인가? 아닙니다. 극복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한 가지만 주의하면 됩니다.
그 한 가지란, 돌아다니는 마음이나 번뇌를 없애려고 노력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없애려고 노력을 하면 훼방꾼이 내민 갈고리에 걸리는 꼴이 되어 애를 먹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와 같은 초기 단계의 훼방꾼은 세력을 형성하고 있지 않은 떠돌이이므로, 일어나는 번뇌를 무심하게 바라보면서 원력을 굳건히 하고 마음을 잘 단속하면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네가 중국을 가든 일본을 가든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관세음보살 염불만 하겠다.(화두만 하겠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으면서 기도 · 참선 · 사경 · 독경 등에 집중을 하게 되면 번뇌의 마구니들은 저절로 없어집니다.
기도를 하다가 번뇌가 일어나고 마음이 동할지라도, 그 번뇌에 상관하지 않고 하던 기도를 열심히 계속하게 되면, 그냥 돌아다니던 그 번뇌란 놈이 스스로 미안했다는 듯이 기도와 함께합니다. 마치 ‘나도 기도를 해야겠다’고 결심이나 한 듯이, 돌아다니던 마음이 도로 기도 속으로 녹아들어 오는 것입니다.
심각한 훼방꾼
이러한 가벼운 훼방꾼에 비해, 어느 정도 공부가 익어갈 때 등장하는 힘쎈 훼방꾼이 있습니다. 곧 지금 생활하고 있는 의식 속의 번뇌가 아니라, 나의 잠재의식 · 무의식 속에 숨겨져 있던 무명업(無明業)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한번 되새겨 보십시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낯선 고장을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거리의 모습이나 풍경이 언제가 와 본 듯이 생생하고, 10년 · 20년 후에까지 기억이 나는 경우를 경험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잠재적인 기억능력입니다.
그렇지만 이 능력을 평소에 늘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파도 따라 출렁이는 고된 삶을 살다 보면 전생의 일은 물론이요 현생에서의 즐거웠던 일, 슬펐던 일, 두려웠던 일들이 차츰 잊혀집니다. 그리고 특별한 감정들은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 속에 깊이 간직됩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거나 참선 · 사경 · 독경 등의 공부를 하여 출렁이던 파도가 잦아들면 마음이 차츰 맑아지는데, 이때 잠재의식이나 무의식 속에 간직되어 있던 무명업이라는 훼방꾼이 깨달음의 공부를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모습을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곧 기도나 참선의 시작단계가 아니라, 기도를 한다면 사소한 게으름이나 일상적인 번뇌의 단계를 넘어서서 기도의 힘이 쌓이기 시작할 때, 참선을 한다면 어느 정도 화두가 잘 들린다고 생각될 때쯤 찾아들게 되는 훼방꾼입니다.
일반적으로 자주 나타나는 훼방꾼으로는 기쁨〔喜〕 · 슬픔〔悲〕 · 두려움〔怖〕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훼방꾼은 모든 공부인에게 다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훼방꾼들이 나에게 나타나지 않을까’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그 내용을 알고 있으면 혹 이러한 훼방꾼이 나타날 때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기쁨의 훼방꾼〔喜魔〕은 계속 터져 나오는 웃음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쁨에 젖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 기쁨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왠지 모르게 하염없이 기쁘고 좋습니다. 마냥 싱글벙글 웃으며 정진하고 웃으며 생활합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자의적인 웃음이 아닙니다.
누가 좋지 않은 일을 당하여 잔뜩 찌푸려 있을 때도 옆에서 마냥 웃습니다. 그야말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이를 보고 누군가가 꾸짖으면 입으로는 ‘잘못했습니다.’ 하면서 계속 싱글벙글 웃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쁨과 웃음’이 함께 하는 것이 어째서 훼방꾼이냐고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깨달음의 법열(法悅)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잔잔한 기쁨이 아니라 잠재의식과 무의식의 창고에 감추어져 있던 웃음보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과도 같아서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곧 자제력 없는 웃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의 훼방꾼보다 더한 것은 슬픔의 훼방꾼〔悲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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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東山, 1890~1964)큰스님께서 부산 범어사의 조실로 계실 때 선방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수십 명의 스님이 열심히 좌선정진을 하고 있는데, 한 스님이 한쪽 발끝으로 바닥을 짚고 서서 찡얼찡얼 울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주변 스님들이 그의 몸을 흔들자 정신을 차리며 소리쳤습니다.
“어? 그 많던 사람들이 모두 어디로 갔지?”
자세한 까닭을 묻자 그 스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이 무엇고’ 화두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주위의 사람들이 2~3㎜ 크기의 불개미처럼 조그맣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자 수천수만 명이나 되는 조그마한 사람드이 불개미 떼처럼 제 곁으로 몰려드는데, 옷자락으로라도 건드리면 터져 죽을 것만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들에게 옷이 닿지 않게 하기 위해 옷을 추슬러도 보았지만, 차츰 무릎 밑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그들이 눌려 죽을 것만 같아 발로 바닥을 딛고 쪼그리고 앉았더니, 발바닥 밑으로 파고드는 것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저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차츰 발뒤꿈치를 들었다가 나중에는 한쪽 발로만 서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작은 사람들은 계속 모여들었고 옷을 붙들고 매달리며 올라오고 있었으니···.
제가 조금만 움직여도 눌려 죽을 것만 같은 그 사람들이 너무도 불쌍하고 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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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슬픔의 훼방꾼에게 사로잡히면 자꾸만 울게 됩니다. 사람을 만나도 울고, 혼자 있으면서 울고, 절하면서 참선하면서 계속 눈물을 흘립니다. 까닭도 없이 자꾸 눈물을 흘립니다. 뚜렷한 참회의 눈물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눈물이요 슬픔인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의 정진을 가로막는 두려운 훼방꾼〔怖魔〕이 등장하면 한동안 우리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이 두려움의 훼방꾼에게 걸리면 기도를 하는 법당으로 들어가기가 싫어집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기도를 멈추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현상이 벌어지는가 하면, 심하게는 목탁을 치며 기도를 하고 있는 ‘나’에게 느닷없이 큰 몽둥이를 든 사람이 나타나 두드려 패는 듯한 두려움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매우 심한 두려움에 휩싸이는 경우에는 ‘머리끝이 쭈뼛한’ 정도가 아닙니다. 머리털뿐만이 아니라 몸 전체의 털 하나하나에 한 사람씩 붙어 한 사람씩 잡아당기는 듯한 공포에 휩싸입니다. 그야말로 ‘몸뚱어리가 딱 얼어붙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상과 같은 기쁨 · 슬픔 · 두려움의 훼방꾼이 등장하는 것은 무의식 ·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던 무명업력이 표출되면서 업들이 녹아내린다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훼방꾼의 나타남은 수행을 잘하고 있다는 증거요 수행이 잘 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훼방꾼들이 나타나더라도 당황해하지 마십시오. 여기에 속지도 말고 흔들리지도 말고 기도 · 참선 · 사경 · 독경을 더욱 열심히 하십시오.
기도를 하는 사람이라면 기쁨도 슬픔도 두려움도 그리고 어떠한 감정과도 벗하지 말고 계속하던 기도에 집중하면 되고, 화두를 드는 사람은 화두만 밀고 나가면 모든 훼방꾼은 스스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옛 말씀에 “도가 깊어지면 마도 성해진다.〔道高魔盛〕”고 하였듯이,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훼방꾼이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도가 깊어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곧 의식의 세계보다는 더 깊은 잠재의식과 무의식에 감추어져 있던 응어리가 녹아내리는 기회요 고비로 알고, 스스로가 세운 서원(誓願)에 따라 흔들림 없이 정진해야 합니다.
속기 쉬운 순경계의 훼방꾼
수행을 방해하는 훼방꾼 중에는 싫고 맞지 않는 역경계(逆境界)의 훼방꾼도 있고, 아주 좋고 끌리는 순경계(順境界)의 훼방꾼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훼방꾼 중에서 보다 극복하기가 어려운 것은 순경계입니다.
역경계는 ‘나’에게 맞지 않고 괴로움을 주기 때문에 오히려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굳게 가지게 하지만, 순경계는 즐거움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극복하고자 하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순경계에 부딪히면 더욱 조심하고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실제로 ‘관세음보살’ 정근을 하거나 ‘천수다라니’를 열심히 외우다 보면 묘한 순경계를 접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정진을 하는데, 갑자기 관세음보살이 직접 화현하여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쁘다’, ‘잘났다’, ‘미인이다’라는 등의 이 세상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관세음보살이 나타납니다.
때로는 연꽃 위에 서서, 때로는 공중을 둥둥 떠다니는 연꽃을 타고, 때로는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기도하는 사람의 등을 톡톡 두드리며 속삭입니다.
“장하다, 정말 잘하는구나.”
때로는 이마를 어루만져주며 인정을 해줍니다.
“네가 그토록 나의 이름을 열심히 불렀으니, 이제 깨달음의 눈을 주리라. 기도는 그만하도록 해라.”
하지만 이 등장인물이 불보살이 아니라, 바로 ‘순경계의 훼방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순경계의 훼방꾼을 극복하지 못하고 정진을 그만두면 어떠한 업도 녹이지 못하고, 다시 업보중생의 자리로 돌아가 버립니다. 어떤 때는 더 나쁜 결과 속으로 굴러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아울러 기도나 참선 등의 수행을 꾸준히 하다 보면 광명이 계속 나타나기도 하고, 평소에 느껴 보지 못했던 신비한 경계가 눈앞에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앞날이 또렷이 보이기도 하고, 남의 운명이 그대로 비치기도 하며, 불보살님이 나타나 시험을 하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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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가 완전히 끝나기 몇 달 전인 1953년, 나는 보경사 서운암에서 능엄주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70일쯤 되었을 때부터 심한 장난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새벽녘이 되어 눈을 뜨면 ‘오늘 몇 시에 어디에 사는 누가 온다’라는 생각이 드는데, 정말 그때가 되면 그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며칠이 더 지나자 가만히 방에 앉아 이십 리 삼십 리 밖의 신도들 집이 다 보였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생각만 일으키면 눈앞에 있는 TV를 보듯이 동네의 모든 집이 보이고,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도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밥상 위의 반찬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가 낱낱이 보였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어떤 사람이 내 앞에 서면 그 사람의 몸이 마치 투명체처럼 다 들여다 보이고, 뼈 마디마디까지 그대로 보였습니다. 그 사람은 아직 아무것도 못 느끼고 있건만 병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까지 진행되었으며, 얼마 후면 어느 자리에서 어떻게 아픈 상태가 벌어진다는 것이 내 눈에는 다 읽혀졌습니다.
또 아픈 사람에게 내 생각대로 앞에 있는 나뭇가지를 하나 꺾어주면서 ‘이것을 씹어서 잡수시라’든지, 잎을 따서 ‘이걸 달여 먹으면 낫는다’고 하면, 약도 아닌데 분명히 그 사람의 병이 낫는 것이었습니다.
이듬해가 되자 나는 덕숭산 정혜사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도를 깨달은 금봉(錦峰)스님께서 경험했던 일들을 자랑처럼 말씀드렸더니 대뜸 호통을 치셨습니다.
“이 마구니 새끼! 중노릇을 한 게 아니고 마구니 노릇을 했구나. 너같은 놈 살려 놓으면 여러 사람을 망쳐 놓는다. 당장 주문을 버리든지 이 자리에서 죽든지를 택해라.”
그날부터 스님께서는 일체 바깥 출입을 못하게 하셨고, 곁에 머물게 하시어 ‘아무것도 하지 말라’며 엄히 단속해주셨기에, 겨우 이 경계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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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기도 · 참선 · 사경 · 관행(觀行) 등을 닦다가 새로운 능력이 나타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기하고 흥미로운 이 경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는 수가 많습니다.
정녕 이때가 문제입니다. 이때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번뇌 때문에 일렁거리던 자기의 마음이 맑아져서, 이제까지는 비치지 않던 무엇인가가 비치는 것일 뿐, 아직은 완전히 맑아지고 밝아진 경지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때에 스스로의 자세를 더욱 가다듬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정녕 수행의 훼방꾼들을 잘 극복하려면 기도나 참선 중에 나타나는 순(順)과 역(逆)의 모든 경계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 어떠한 것도 마장(魔障)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임해야 합니다.
절대로 새로운 경지에 재미를 느끼지 마십시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정진 이외에는 모두가 아무것도 아니다. 무엇이 다가오든 내 알 바가 아니다. 모두 놓아 버리고 내 공부로 돌아가리라!’
진실로 이러한 자세로 정진해야 흔들림 없이 깨달음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물며 앞일이 보인다고 하여, 남의 운명이 비친다고 하여 재미를 느낀 데서야 어느 세월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겠습니까?
수행을 하다보면 고비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고비는 하나하나 넘겨야 합니다. 지금 넘어서지 못하면 다시 번뇌망상의 괴로운 삶 속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번뇌가 없는 원래의 깨달은 자리가 아니라, 끝없는 방황과 윤회의 삶 속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참으로 자신을 사랑한다면 얕거나 깊거나를 가릴 것 없이 다가서는 훼방꾼들을 극복하면서 부지런히 수행하십시오. 기도를 하든 참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경전공부를 하든, 삼매를 이루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할 때까지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고 삼매를 이루게 되면, 나고 죽음이 없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게 되고, 나고 죽음이 없음을 확실히 깨닫고 나면 이 세상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이 그대로 편안하고 행복한, 영원생명 · 무한광명이 가득 찬 세계로 바뀝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결코 훼방꾼이 아닙니다. 우리의 수행하는 자세입니다. 자세만 바르면 훼방꾼들은 오래 벗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어나는 번뇌망상과 고비 고비에 모습을 나타내는 각종 훼방꾼들이 우리를 출격대장부로 만들어준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부지런히 정진하시기를 두 손 모아 축원 드립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