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Ⅱ] 국제학술대회 및 법화산림_① 삼장의 재중적 해석에 대한 재고 필요성 / 진우기
[불기2534(2007년)
작성자
전국비구니회
작성일
2018-06-22 14:17
조회
2722
[기획특집Ⅱ] 국제학술대회 및 법화산림
삼장의 재중적 해석에 대한 재고 필요성 / 진우기
태국의 사회적 종교적 배경
티벳과 마찬가지로 태국은 13세기 건국 이래로 여성 수계가 전무했던 나라다. 태국에서 수용하고 번창했던 불교는 본래 스리랑카에서 전해받은 테라바다불교로 알고 있으나 적어도 3개의 신앙체계가 혼합되었으니 바로 애니미즘, 브라만교, 불교가 그것이다. 애니미즘은 산신, 지신, 집의 신, 배의 신 등을 믿는 것으로서 700년전 태국의 신앙체계고 아직도 지역인들이 숭상하고 있다. 반면 브라만교는 화려한 제례와 금기체계가 특징이다. 마지막으로 더해진 불교의 경우 태국인들은 업의 개념을 잘 알고 있다. 업의 부정적 측면으로는 개인의 삶의 상황을 업의 결과로 받아들여 무력하게 방치하는 것이다. 긍정적 측면으로는 업을 믿기 때문에 복수심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태국인들은 보시를 잘 한다. 사회계급에 상관없이 보시를 최고의 수행으로 여기고 실천하는 것은 금생과 내생을 위한 공덕을 쌓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하여 재가자들도 계율을 지키며 특히 지식인들이 점점 더 위파사나, 사마타 명상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불교를 진지하게 공부하려는 사람도 불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진 사람도 별로 없다. 태국이 세계 1위의 불교 인구를(95%) 가진 것을 감안할 때 이는 충격적이다. 최고의 영적 목표인 니르바나는 일반인에게 너무 어려우리라는 우려로 가르치고 있지 않다. 따라서 불교 지식은 상가에 한정되어 있다. 20만명의 태국 비구 중 대학졸업자는 10%도 채 되지 않는다.
여성 수계의 역사
13세기에 건국한 태국에는 처음부터 비구니 수계가 들어온 적이 없다. 수코타이 왕국(13세기)은 남녀 모두에게 불교수행의 자유를 주었지만 여성 수계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 대신 흰색승복을 입고 다소 종교적인 삶을 사는 매치가 있다. 매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400년 전 아유디야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정부의 인정도 후원도 받지 못한 이들은 현재 고작 1만명이(남승은 30만) 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비구니가 배출된 것은 3번이다. 최초의 시도는 1928년 불교 비평가이며 정치가였던 나린 클루엥이 사라, 춍디의 두 딸을 수계시켜 사부대중의 복원을 지지한데서 시작했다. 나린 클루엥은 상가에 대해 매우 비평적이었다. 국가가 재정적 고난에 빠졌을 때 그는 종정에게 재산의 일부를 국가에 보시하라 했고 그런 그의 직언은 상가나 국가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는 여러 번 수감되었고 수계받은 딸들도 박해를 겪었으니 감옥에 갇히고 종국에는 환속을 해야만 했다.
당시 종정(상가라자)은 모든 태국 비구들에게 여성 수계를 금지시켰으니 이는 이후 태국 비구니 수계의 발전에 늘 걸림돌로 작용했다. 1932년 입헌국가 설립 이후 국왕조차도 헌법을 준수해야 했지만 종정의 1928년 명령은 여전히 유효한 상태다.
제2의 비구니 수계는 나의 모친 보라마이 카빌싱이 1954년 출가하여 1970년 대만에서 비구니 수계를 받은 일이다. 상가 없이 홀로 지냈던 그녀를 사회는 (태국불교가 아닌) 대승불교 사람이라고 무시했다. 하지만 그녀는 승원을 세웠고 참다운 불교 가르침을 재가자에게 펴 불교 교육의 초석을 놓았다. 2003년 세수 96세에 스님은 딸인 나의 비구니 수계를 지켜본 후 입적했다.
제3의 비구니 수계는 내가 2001년 스리랑카에 가서 사미니계를, 2003년 비구니계를 받은 것이었다. 첫해 나는 많은 비난과 인신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를 견뎌내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이며 결과가 있음을 증명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나자 수계에 관심을 가진 여성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태국과 스리랑카에서 수계를 받으면서 현재 태국 테라바다 법맥에는 사미니가 16명, 비구니가 6명 존재하고 있다.
테라바다 불교
여성 수계에 대한 반감은 아마도 테라바다 불교의 생성기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부처님께서 입멸하신지 3개월 후 제1차 결집이 열리면서 테라바다가 설립되었으며 비구들이 여성 수계에 대한 반대의견을 표명했다는 증거도 이때부터 시작된다. 제1차결집을 좀더 철저히 이해하기 위해선 부처님께서 입멸하기 직전의 맥락과 상황을 전해주는 대반열반경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본 논문에 직접 관련된 부분만 짚어보겠다.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이 사촌이며 시봉인 아난다와 함께 한 여행의 기록이다. 500명의 비구와 함께 한 마지막 여행길에서 부처님이 진정 돌아가시려 함을 알고 매우 슬퍼진 아난다는 마음을 추스르려 밖으로 나갔다. 바로 이때 부처님은 아난다가 (이전 부처들의 시봉에 비할 때) 다양한 사람들이 부처님을 뵈러 올 때마다 그들을 어찌 대해야 아는지 제대로 아는 최고의 시봉이었다고 칭찬한다.
지난 25년간 부처님이 직접 선택하여 최측근에서 모셔왔던 시봉이며 사촌인 아난다가 실제로 법을 이어받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좋은 기억력을 가졌고(이 점을 부처님이 칭찬함) 또한 직무 상 그는 지난 25년간 부처님이 설하신 모든 법문을 다 들었다.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국왕과 각료들은 당연히 아난다에게 법의 수행을 의논하러 왔다.
아난다가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마하가섭이 라자그리하에서 500명의 아라한을 초대하여 최초결집을 주최할 때 아난다가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다르마와 율장에 풍부한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서 당연히 초대를 받아야 마땅했다.(하지만 아난다는 결집 하루 전날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님은 특정인을 상가의 리더로 선택하겠다는 의지를 명시하지 않고 대신 법과 율이 상가의 등불이 되어야 한다고 유교했다. 하지만 최초 결집에서 리더의 중요성이 분명히 대두되었다. 당연히 상가의 리더가 되어야 했던 아난다는 바로 이 최초 결집에서 부처님의 임종 및 이후 범한 5가지 죄를 고백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서 모욕을 받았고 권위도 함께 축소되었다. 분명 최초 결집의 숨겨진 의제는 파워를 상가에 이양하는 것이었고 그 쟁점은 여성 수계 문제였다고 생각할만한 정황적 증거가 있다. 심리적으로 이것이 주효했던 것은 초기 비구들이 대체로 브라만교 집안 출신이고 수계를 받은 후에도 여성을 적대시하는 사회적 금기를 완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초 결집이 개회하자마자 아난다는 여성이 종단에 들어오는 것에 일조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아난다는 마하프라자파티가 부처님의 이모 겸 계모였고 부처에게 젖을 먹여 키운 여성이기에 자신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섯가지 죄 중에는 여성에 관한 것이 또 하나 있으니 아난다가 장로 비구들보다 앞서 여성들이 먼저 부처님 시신에 예경하도록 허락했다는 것이다. 다시한번 아난다는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고 여성들이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한번 대반열반경에서 부처님은 아난다를 칭찬할 때 사람들을 맞이하는 법을 알았고 다양한 집단이 부처님을 친견하도록 주선함에 있어 최고의 시자라고 칭찬했음을 상기하기 바란다.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을 믿을 것인지 또는 최초결집에서 마하가섭이 이끌었던 상가를 믿을 것인지 고심할 필요가 있다. 분명 마하가섭이 직접 작성한 초대인 명단은 주로 마하가섭의 친구와 친지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는 부처님께서 후에 상가가 제거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신 소소한 율이 무엇이냐를 결정할 시간이 왔다. 이들은 어떤 것이 소소한 율인지 결정할 수가 없었고, 율장을 암송했다는 우팔리 존자나, 부처님께서 율에 최고라고 칭찬했던 한 아라한은 놀랍게도 이 결정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마하가섭은 율장을 있는 그대로 보존할 것, 이후 추가도 삭제가 없을 것을 제안했고 상가는 그를 결의했다.
최초결집 직후 푸라나 장로가 500명의 제자와 함께 자라그리하로 왔다. 그는 500명의 초대인 중에 속하지 않았기에 회의 내용을 물었고 이를 다 들은 후에 그는 마하가섭과 500명 장로가 그런 법과 율에 동의한 것은 좋은 일이나 자신은 자신의 귀를 통해 부처님께 직접 들은 것만을 지키고 수행하겠노라고 했다. 이를 참작할 때 후에 테라바다로 자라난 불교는 적어도 최초에는 모두가 합의한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문헌을 다시 읽을 필요성
-비구니 법맥은 죽어 사라졌으며 다시 복원될 수 없다:
이런 믿음은 비구니 수계를 도입하려는 시도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비구니 수계식은 이부승 수계로 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율장 소품에 있듯이 비구들만으로도 수계를 할 수 있다는 부처님 말씀을 무시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후에 이부승 수계를 허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부승 수계를 거두신 적도 없다.
태국에서 비구 교육은 단 2개의 비구불교대학이 맡고 있다. 최고단계인 나크담마의 교과서에 짧게 수록된 비구니 부분에 의하면 상가미타 여장로가 BC 3세기에 스리랑카로 갔는데 비구니수계를 할만한 집단을 대동하지 않고 혼자 갔다는 것이다. 실은 상가미타 공주는 최소한 18명의 학식있는 비구니를(4세기 연대기인 ‘도왕통사’에 그들 이름이 수록되어 있음) 대동하여 스리랑카의 아눌라 공주와 그 수행원들에게 여법한 수계식을 해주었다. 스리랑카로 간 목적이 수계였던 그녀가 홀로 갈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이는 교과서의 저자가 여성 수계 문제에 얼마나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며 이를 배우는 젊은 남승들은 당연히 태국에서 비구니 수계가 불가능하다는 쪽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여성을 상가에 허용하면 불법의 수명이 단축될 것이다:
이는 부처님께서 여성을 입문시킨 후 아난다와 나눈 대화의 일부이나, 그 말씀을 한 후 마지막 단락에서 부처님은 그를 알고 있기에 예방과 보호 조치로서 여성에게 8경계를 설했으니 이는 단지 홍수를 막기 위해 댐을 쌓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셨다. 논리적으로 볼 때 여성으로 인해 법이 쇠락할 것을 알면서도 부처님께서 비구니승단을 설립했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러므로 그런 잘못된 믿음이 나온 것은 부처님 말씀을 당시의 전체적 맥락 밖에서 해석한 결과이다.
-여성을 상가에 입문시킴으로써 사회구조가 취약해질 것이다:
이런 비난은 심지어 부처님 당시에도 샤카족 여성들에게 수계를 줄 때 나왔다. 여성은 가정의 중심이고 가족의 행복은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할머니로서 여성의 역할에 크게 의존한다. 최초로 수계를 받은 샤카족 여성들은 모두 과부거나 남편들이 이전에 비구승이 된 여성들이었다. 출가승의 생활은 쉽지도 안락하지도 않기에 이 길은 오직 굳은 의지를 가진 소수에게만 가능했다.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뜻에 따른 4부대중을 설립하기 위해 여성에게 주어져야 하는 기회이다.
-여성은 남성의 청정에 장애가 된다:
이 역시 사실이지만 역시 불완전한 인용이다. 그 다음 줄에서 부처님께서는 또 남성 역시 여성의 수행에 장애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단지 첫 번째 말씀만이 되풀이되는 것은 태국에서 법을 설하고 가르치는 사람이 남승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씀의 일부만을 인용함으로써 또 다른 부정적 메시지를 만들었으니 여성은 남승의 가치를 크기 강조하는 반면 자신들을 비하시키고 자신감까지 저하되었다.
결론
율사들은 율장만을 엄수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테라바다 대승 금강승에 공히 그러하다. 나는 불교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부처님께서 법과 율을 등불로 삼고 가라고 하신 유교를 잊지 말아야 한다 생각한다. 단지 율을 맹목적으로 고집할 것이 아니라 율을 진정 이해하기 위해선 법을 적용해야 한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율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처음 사리불이 율의 제정의 필요성을 거론했을 때 부처님은 초기 상가가 깨달은 비구로 구성되어 있기에 필요없다고 하셨다. 단지 상가가 성장을 시작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상가에 유입된 후에야 상가의 평화로운 삶, 좋은 비구의 증진, 부끄러움을 모르는 비구의 억제, 재가자 믿음의 증진을 위한 수단으로 율이 도입된 것이다.
비구니 상가의 존재는 번창하는 불교공동체의 증거이다. 불교권 안에 억압과 착취가 남아있다면 국제무대에 나서 부처님 가르침의 자비와 아름다움을 말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삼장의 재중적 해석에 대한 재고 필요성 / 진우기
태국의 사회적 종교적 배경
티벳과 마찬가지로 태국은 13세기 건국 이래로 여성 수계가 전무했던 나라다. 태국에서 수용하고 번창했던 불교는 본래 스리랑카에서 전해받은 테라바다불교로 알고 있으나 적어도 3개의 신앙체계가 혼합되었으니 바로 애니미즘, 브라만교, 불교가 그것이다. 애니미즘은 산신, 지신, 집의 신, 배의 신 등을 믿는 것으로서 700년전 태국의 신앙체계고 아직도 지역인들이 숭상하고 있다. 반면 브라만교는 화려한 제례와 금기체계가 특징이다. 마지막으로 더해진 불교의 경우 태국인들은 업의 개념을 잘 알고 있다. 업의 부정적 측면으로는 개인의 삶의 상황을 업의 결과로 받아들여 무력하게 방치하는 것이다. 긍정적 측면으로는 업을 믿기 때문에 복수심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태국인들은 보시를 잘 한다. 사회계급에 상관없이 보시를 최고의 수행으로 여기고 실천하는 것은 금생과 내생을 위한 공덕을 쌓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하여 재가자들도 계율을 지키며 특히 지식인들이 점점 더 위파사나, 사마타 명상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불교를 진지하게 공부하려는 사람도 불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진 사람도 별로 없다. 태국이 세계 1위의 불교 인구를(95%) 가진 것을 감안할 때 이는 충격적이다. 최고의 영적 목표인 니르바나는 일반인에게 너무 어려우리라는 우려로 가르치고 있지 않다. 따라서 불교 지식은 상가에 한정되어 있다. 20만명의 태국 비구 중 대학졸업자는 10%도 채 되지 않는다.
여성 수계의 역사
13세기에 건국한 태국에는 처음부터 비구니 수계가 들어온 적이 없다. 수코타이 왕국(13세기)은 남녀 모두에게 불교수행의 자유를 주었지만 여성 수계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 대신 흰색승복을 입고 다소 종교적인 삶을 사는 매치가 있다. 매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400년 전 아유디야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정부의 인정도 후원도 받지 못한 이들은 현재 고작 1만명이(남승은 30만) 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으로 비구니가 배출된 것은 3번이다. 최초의 시도는 1928년 불교 비평가이며 정치가였던 나린 클루엥이 사라, 춍디의 두 딸을 수계시켜 사부대중의 복원을 지지한데서 시작했다. 나린 클루엥은 상가에 대해 매우 비평적이었다. 국가가 재정적 고난에 빠졌을 때 그는 종정에게 재산의 일부를 국가에 보시하라 했고 그런 그의 직언은 상가나 국가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는 여러 번 수감되었고 수계받은 딸들도 박해를 겪었으니 감옥에 갇히고 종국에는 환속을 해야만 했다.
당시 종정(상가라자)은 모든 태국 비구들에게 여성 수계를 금지시켰으니 이는 이후 태국 비구니 수계의 발전에 늘 걸림돌로 작용했다. 1932년 입헌국가 설립 이후 국왕조차도 헌법을 준수해야 했지만 종정의 1928년 명령은 여전히 유효한 상태다.
제2의 비구니 수계는 나의 모친 보라마이 카빌싱이 1954년 출가하여 1970년 대만에서 비구니 수계를 받은 일이다. 상가 없이 홀로 지냈던 그녀를 사회는 (태국불교가 아닌) 대승불교 사람이라고 무시했다. 하지만 그녀는 승원을 세웠고 참다운 불교 가르침을 재가자에게 펴 불교 교육의 초석을 놓았다. 2003년 세수 96세에 스님은 딸인 나의 비구니 수계를 지켜본 후 입적했다.
제3의 비구니 수계는 내가 2001년 스리랑카에 가서 사미니계를, 2003년 비구니계를 받은 것이었다. 첫해 나는 많은 비난과 인신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를 견뎌내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이며 결과가 있음을 증명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나자 수계에 관심을 가진 여성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태국과 스리랑카에서 수계를 받으면서 현재 태국 테라바다 법맥에는 사미니가 16명, 비구니가 6명 존재하고 있다.
테라바다 불교
여성 수계에 대한 반감은 아마도 테라바다 불교의 생성기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부처님께서 입멸하신지 3개월 후 제1차 결집이 열리면서 테라바다가 설립되었으며 비구들이 여성 수계에 대한 반대의견을 표명했다는 증거도 이때부터 시작된다. 제1차결집을 좀더 철저히 이해하기 위해선 부처님께서 입멸하기 직전의 맥락과 상황을 전해주는 대반열반경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본 논문에 직접 관련된 부분만 짚어보겠다.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이 사촌이며 시봉인 아난다와 함께 한 여행의 기록이다. 500명의 비구와 함께 한 마지막 여행길에서 부처님이 진정 돌아가시려 함을 알고 매우 슬퍼진 아난다는 마음을 추스르려 밖으로 나갔다. 바로 이때 부처님은 아난다가 (이전 부처들의 시봉에 비할 때) 다양한 사람들이 부처님을 뵈러 올 때마다 그들을 어찌 대해야 아는지 제대로 아는 최고의 시봉이었다고 칭찬한다.
지난 25년간 부처님이 직접 선택하여 최측근에서 모셔왔던 시봉이며 사촌인 아난다가 실제로 법을 이어받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좋은 기억력을 가졌고(이 점을 부처님이 칭찬함) 또한 직무 상 그는 지난 25년간 부처님이 설하신 모든 법문을 다 들었다.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국왕과 각료들은 당연히 아난다에게 법의 수행을 의논하러 왔다.
아난다가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마하가섭이 라자그리하에서 500명의 아라한을 초대하여 최초결집을 주최할 때 아난다가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다르마와 율장에 풍부한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서 당연히 초대를 받아야 마땅했다.(하지만 아난다는 결집 하루 전날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님은 특정인을 상가의 리더로 선택하겠다는 의지를 명시하지 않고 대신 법과 율이 상가의 등불이 되어야 한다고 유교했다. 하지만 최초 결집에서 리더의 중요성이 분명히 대두되었다. 당연히 상가의 리더가 되어야 했던 아난다는 바로 이 최초 결집에서 부처님의 임종 및 이후 범한 5가지 죄를 고백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서 모욕을 받았고 권위도 함께 축소되었다. 분명 최초 결집의 숨겨진 의제는 파워를 상가에 이양하는 것이었고 그 쟁점은 여성 수계 문제였다고 생각할만한 정황적 증거가 있다. 심리적으로 이것이 주효했던 것은 초기 비구들이 대체로 브라만교 집안 출신이고 수계를 받은 후에도 여성을 적대시하는 사회적 금기를 완전히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초 결집이 개회하자마자 아난다는 여성이 종단에 들어오는 것에 일조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아난다는 마하프라자파티가 부처님의 이모 겸 계모였고 부처에게 젖을 먹여 키운 여성이기에 자신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섯가지 죄 중에는 여성에 관한 것이 또 하나 있으니 아난다가 장로 비구들보다 앞서 여성들이 먼저 부처님 시신에 예경하도록 허락했다는 것이다. 다시한번 아난다는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고 여성들이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한번 대반열반경에서 부처님은 아난다를 칭찬할 때 사람들을 맞이하는 법을 알았고 다양한 집단이 부처님을 친견하도록 주선함에 있어 최고의 시자라고 칭찬했음을 상기하기 바란다.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을 믿을 것인지 또는 최초결집에서 마하가섭이 이끌었던 상가를 믿을 것인지 고심할 필요가 있다. 분명 마하가섭이 직접 작성한 초대인 명단은 주로 마하가섭의 친구와 친지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리고는 부처님께서 후에 상가가 제거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신 소소한 율이 무엇이냐를 결정할 시간이 왔다. 이들은 어떤 것이 소소한 율인지 결정할 수가 없었고, 율장을 암송했다는 우팔리 존자나, 부처님께서 율에 최고라고 칭찬했던 한 아라한은 놀랍게도 이 결정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마하가섭은 율장을 있는 그대로 보존할 것, 이후 추가도 삭제가 없을 것을 제안했고 상가는 그를 결의했다.
최초결집 직후 푸라나 장로가 500명의 제자와 함께 자라그리하로 왔다. 그는 500명의 초대인 중에 속하지 않았기에 회의 내용을 물었고 이를 다 들은 후에 그는 마하가섭과 500명 장로가 그런 법과 율에 동의한 것은 좋은 일이나 자신은 자신의 귀를 통해 부처님께 직접 들은 것만을 지키고 수행하겠노라고 했다. 이를 참작할 때 후에 테라바다로 자라난 불교는 적어도 최초에는 모두가 합의한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문헌을 다시 읽을 필요성
-비구니 법맥은 죽어 사라졌으며 다시 복원될 수 없다:
이런 믿음은 비구니 수계를 도입하려는 시도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비구니 수계식은 이부승 수계로 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율장 소품에 있듯이 비구들만으로도 수계를 할 수 있다는 부처님 말씀을 무시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후에 이부승 수계를 허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부승 수계를 거두신 적도 없다.
태국에서 비구 교육은 단 2개의 비구불교대학이 맡고 있다. 최고단계인 나크담마의 교과서에 짧게 수록된 비구니 부분에 의하면 상가미타 여장로가 BC 3세기에 스리랑카로 갔는데 비구니수계를 할만한 집단을 대동하지 않고 혼자 갔다는 것이다. 실은 상가미타 공주는 최소한 18명의 학식있는 비구니를(4세기 연대기인 ‘도왕통사’에 그들 이름이 수록되어 있음) 대동하여 스리랑카의 아눌라 공주와 그 수행원들에게 여법한 수계식을 해주었다. 스리랑카로 간 목적이 수계였던 그녀가 홀로 갈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이는 교과서의 저자가 여성 수계 문제에 얼마나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며 이를 배우는 젊은 남승들은 당연히 태국에서 비구니 수계가 불가능하다는 쪽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여성을 상가에 허용하면 불법의 수명이 단축될 것이다:
이는 부처님께서 여성을 입문시킨 후 아난다와 나눈 대화의 일부이나, 그 말씀을 한 후 마지막 단락에서 부처님은 그를 알고 있기에 예방과 보호 조치로서 여성에게 8경계를 설했으니 이는 단지 홍수를 막기 위해 댐을 쌓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셨다. 논리적으로 볼 때 여성으로 인해 법이 쇠락할 것을 알면서도 부처님께서 비구니승단을 설립했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러므로 그런 잘못된 믿음이 나온 것은 부처님 말씀을 당시의 전체적 맥락 밖에서 해석한 결과이다.
-여성을 상가에 입문시킴으로써 사회구조가 취약해질 것이다:
이런 비난은 심지어 부처님 당시에도 샤카족 여성들에게 수계를 줄 때 나왔다. 여성은 가정의 중심이고 가족의 행복은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할머니로서 여성의 역할에 크게 의존한다. 최초로 수계를 받은 샤카족 여성들은 모두 과부거나 남편들이 이전에 비구승이 된 여성들이었다. 출가승의 생활은 쉽지도 안락하지도 않기에 이 길은 오직 굳은 의지를 가진 소수에게만 가능했다. 중요한 것은 부처님의 뜻에 따른 4부대중을 설립하기 위해 여성에게 주어져야 하는 기회이다.
-여성은 남성의 청정에 장애가 된다:
이 역시 사실이지만 역시 불완전한 인용이다. 그 다음 줄에서 부처님께서는 또 남성 역시 여성의 수행에 장애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단지 첫 번째 말씀만이 되풀이되는 것은 태국에서 법을 설하고 가르치는 사람이 남승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씀의 일부만을 인용함으로써 또 다른 부정적 메시지를 만들었으니 여성은 남승의 가치를 크기 강조하는 반면 자신들을 비하시키고 자신감까지 저하되었다.
결론
율사들은 율장만을 엄수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테라바다 대승 금강승에 공히 그러하다. 나는 불교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부처님께서 법과 율을 등불로 삼고 가라고 하신 유교를 잊지 말아야 한다 생각한다. 단지 율을 맹목적으로 고집할 것이 아니라 율을 진정 이해하기 위해선 법을 적용해야 한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율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처음 사리불이 율의 제정의 필요성을 거론했을 때 부처님은 초기 상가가 깨달은 비구로 구성되어 있기에 필요없다고 하셨다. 단지 상가가 성장을 시작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상가에 유입된 후에야 상가의 평화로운 삶, 좋은 비구의 증진, 부끄러움을 모르는 비구의 억제, 재가자 믿음의 증진을 위한 수단으로 율이 도입된 것이다.
비구니 상가의 존재는 번창하는 불교공동체의 증거이다. 불교권 안에 억압과 착취가 남아있다면 국제무대에 나서 부처님 가르침의 자비와 아름다움을 말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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