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트] 여승과 고양이
[불기2534(1990년)8월)
작성자
전국비구니회
작성일
2018-06-22 11:03
조회
1687
[꽁트] 여승과 고양이
황충상/소설가
비가 몹시 쏟아지던 여름밤 은 언제 그랬더냐 싶게 먹구름이 걷히고 천공에는 먼빛 별들이 간혹 눈에 띄었다. 서울의 밤거리를 걷다가 별을 본다는 것은 여유가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따위 한눈팔이는 낙오된 어떤 심경일 뿐이다. 그런 심산을 깨물며 그는 우산을 거머쥔 채 종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뜻밖에 한 여인이 다가서며 "어머, 선생님!" 하고 내지르는 소리에 그는 넋을 놓다시피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혀 낯선 여인, 그는 정신을 수습하며 기억 저쪽을 더듬느라 더욱 멍청해질 뿐이었다.
"선생님, 정말 우연이세요. 하지만 언젠가 꼭 이런 식으로 뵙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들었어요."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를 기억할 수 없어 안절부절하며 다가가 물었다.
"혹시 사람을 잘못 보신게 아니세요?" "어머, 잘못 보긴요. 소설 쓰시는 Y선생님 맞죠?"
"그렇습니다만…." "거 보세요. 선생님이 저를 기억 못하시는 건 오히려 당연하세요. 아무튼 거리에서 이러실게 아니라, 어디 가셔서 차(茶)나 한잔하세요."
어느새 그녀는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별수 없이 그는 끌려가며 그녀의 용모에 찬찬히 뜯어 봄으로써 기억의 실마리를 찾았다.
넓은 이마를 가린 생머리를 자연스럽게 뒤로 묶은 헤어스타일, 일찍이 그는 이런 모습을 상상했을망정 직접 현실로 만나 보기는 처음이다.
흰자위와 검은 동공이 분명한 까닭에 맑고 청순해 보이는 눈, 그리고 이런 코를 용비(龍鼻)라 했던가. 가히 거기까지는 관음상을 연상시키기에 족했다. 그런데 아뿔사! 입술이 엷고 작은 것이 흠이었다.
카페에 마주앉아 주문한 차(茶)를 기다리며 그는 그녀의 상을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읽었으나 기억을 돕는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아마도 이건 몸쓸 징조의 꿈이 아닌가?' 그녀의 고혹적인 체취 때문에 그는 속으로 신음하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용서하십시오, 제 결레를…. 어디서 뵈온 분인지요?"
그녀의 눈이 갑자기 흐려졌다. 카페의 실내 조명으로 어찌 상대방 눈빛을 가늠하랴.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느낌 받았다. 순간 그녀의 작은 입이 열렸다.
"묘현 비구니를 기억 못하셔요?" "아!"
그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 맞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과거의 기억 속으로 빨려들었다.
3년 전, 사월파일을 한 달쯤 앞둔 봄날이었다.
그는 여성지 취재기사를 의뢰 받고 여승방을 찾아갔었다. 그 때 묘현스님이 그를 안내했었다.
여승방 취재를 일체 삼간다는 주지스님들을 눌변으로 설득시키기를 무려 한 시간여, 이제는 도리없이 물러갈 수밖에 없구나 싶어 그는 큰절을 올리고 돌아서다말고 마지막으로 심경을 말씀드렸다.
"스님, 여성지 기사가 상술을 앞세워 진위의 갈피를 되려 흐려놓는다는 말씀 백번 옳습니다. 하오나…."
그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주지스님께서 승려를 내세우지 않듯이 그도 작가를 내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설득시키려다 설득을 당하고만 셈이었다.
'이미 설득하려들면 설득을 당하는 법'
그는 댓돌 위에 놓인 구두를 꿰고 일어섰다. 그때 참으로 뜻밖의 말씀이 계셨다.
"이보시오. 젊은이. 내 어찌 그대를 그냥 보내겠고. 인연이야 어떻든 청정한 기사를 쓰기 바라오."
그리고 주지스님은 옆에서 시중들던 스님에게 일렀다.
"젊은이의 승방 안내는 묘현수좌가 맡도록 하라."
조지훈 선생의 〈승무〉를 떠올리며, 그는 묘현스님과 첫상면을 했다.
'파르란이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우고…'
속세를 떠났다는 청정함, 비구니 묘현의 눈은 청아한 빛을 머금고 잇었다. 여인이면서 여인의 거울, 이런 여인의 구도 정신을 두고 이르는 말일레라.
아무 뜻도 없이 그는 마음이 저릿저릿 감전 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거기에 번뇌의 고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렇다. 이러한 번뇌를 묶어 버리기 위해 여인은, 아니 비구니 묘현은 존재의 닻을 놓고 있는 것이었다.
비로소 취재를 마치고 묘현스님과 일주문까지 걸어 나왔다.
"스님 은혜로운 취재를 끝냈습니다. 이 보답은 글로 하는 수밖에 없는데, 재주가 모자라 재대로 표현될지 두렵습니다, 부디 저를 위해 염불 해 주십시오. 그 공덕 의지하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는 배웅하는 묘현스님에게 합장을 하고 머리를 숙였다.
"예, 믿음의 의지를 키우세요. 그러면 좋은 기사가 씌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건 사담이지만 속세에는 없는 일이라 첨언을 드리겠습니다."
그 이야기는 묘현스님의 자신의 가슴에서 불덩이 하나를 내놓는 듯싶었다.
"우리 승방에 한 마리의 고양이가 살고 있어요. 제 법명의 끝자리를 붙여 현이라고 부르며 제가 거두고 있지요. 그런데 그 고양이가 전혀 육식을 하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어떤 결과가 온 줄 아세요. 털이 빠지기 시작하더니 맨살 가죽의 고양이가 되어 가도 있어요. 조금 전 승방 취재 때 보여드릴까 몇 번 망설이다 그만 두었어요. 보여드리고 싶다는 유혹, 지금도 강하게 느껴요. 그 까닭을 모르겠어요. 어쩌면 이 세상에 육식을 전혀 하지 않는 고양이가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해야 될 일인지도 모르죠."
그는 완료된 기억을 밀치고 전직 승려 묘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고양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었어요."
"고양이의 죽음이 스님을 환속시켰군요?"
그러나 그는 묻지 않았다. 그녀의 현상, 그 이상의 답을 구할 수 없기 때문에.
황충상/소설가
비가 몹시 쏟아지던 여름밤 은 언제 그랬더냐 싶게 먹구름이 걷히고 천공에는 먼빛 별들이 간혹 눈에 띄었다. 서울의 밤거리를 걷다가 별을 본다는 것은 여유가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따위 한눈팔이는 낙오된 어떤 심경일 뿐이다. 그런 심산을 깨물며 그는 우산을 거머쥔 채 종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뜻밖에 한 여인이 다가서며 "어머, 선생님!" 하고 내지르는 소리에 그는 넋을 놓다시피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혀 낯선 여인, 그는 정신을 수습하며 기억 저쪽을 더듬느라 더욱 멍청해질 뿐이었다.
"선생님, 정말 우연이세요. 하지만 언젠가 꼭 이런 식으로 뵙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들었어요."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녀를 기억할 수 없어 안절부절하며 다가가 물었다.
"혹시 사람을 잘못 보신게 아니세요?" "어머, 잘못 보긴요. 소설 쓰시는 Y선생님 맞죠?"
"그렇습니다만…." "거 보세요. 선생님이 저를 기억 못하시는 건 오히려 당연하세요. 아무튼 거리에서 이러실게 아니라, 어디 가셔서 차(茶)나 한잔하세요."
어느새 그녀는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별수 없이 그는 끌려가며 그녀의 용모에 찬찬히 뜯어 봄으로써 기억의 실마리를 찾았다.
넓은 이마를 가린 생머리를 자연스럽게 뒤로 묶은 헤어스타일, 일찍이 그는 이런 모습을 상상했을망정 직접 현실로 만나 보기는 처음이다.
흰자위와 검은 동공이 분명한 까닭에 맑고 청순해 보이는 눈, 그리고 이런 코를 용비(龍鼻)라 했던가. 가히 거기까지는 관음상을 연상시키기에 족했다. 그런데 아뿔사! 입술이 엷고 작은 것이 흠이었다.
카페에 마주앉아 주문한 차(茶)를 기다리며 그는 그녀의 상을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읽었으나 기억을 돕는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아마도 이건 몸쓸 징조의 꿈이 아닌가?' 그녀의 고혹적인 체취 때문에 그는 속으로 신음하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용서하십시오, 제 결레를…. 어디서 뵈온 분인지요?"
그녀의 눈이 갑자기 흐려졌다. 카페의 실내 조명으로 어찌 상대방 눈빛을 가늠하랴.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느낌 받았다. 순간 그녀의 작은 입이 열렸다.
"묘현 비구니를 기억 못하셔요?" "아!"
그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 맞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과거의 기억 속으로 빨려들었다.
3년 전, 사월파일을 한 달쯤 앞둔 봄날이었다.
그는 여성지 취재기사를 의뢰 받고 여승방을 찾아갔었다. 그 때 묘현스님이 그를 안내했었다.
여승방 취재를 일체 삼간다는 주지스님들을 눌변으로 설득시키기를 무려 한 시간여, 이제는 도리없이 물러갈 수밖에 없구나 싶어 그는 큰절을 올리고 돌아서다말고 마지막으로 심경을 말씀드렸다.
"스님, 여성지 기사가 상술을 앞세워 진위의 갈피를 되려 흐려놓는다는 말씀 백번 옳습니다. 하오나…."
그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주지스님께서 승려를 내세우지 않듯이 그도 작가를 내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설득시키려다 설득을 당하고만 셈이었다.
'이미 설득하려들면 설득을 당하는 법'
그는 댓돌 위에 놓인 구두를 꿰고 일어섰다. 그때 참으로 뜻밖의 말씀이 계셨다.
"이보시오. 젊은이. 내 어찌 그대를 그냥 보내겠고. 인연이야 어떻든 청정한 기사를 쓰기 바라오."
그리고 주지스님은 옆에서 시중들던 스님에게 일렀다.
"젊은이의 승방 안내는 묘현수좌가 맡도록 하라."
조지훈 선생의 〈승무〉를 떠올리며, 그는 묘현스님과 첫상면을 했다.
'파르란이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우고…'
속세를 떠났다는 청정함, 비구니 묘현의 눈은 청아한 빛을 머금고 잇었다. 여인이면서 여인의 거울, 이런 여인의 구도 정신을 두고 이르는 말일레라.
아무 뜻도 없이 그는 마음이 저릿저릿 감전 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거기에 번뇌의 고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렇다. 이러한 번뇌를 묶어 버리기 위해 여인은, 아니 비구니 묘현은 존재의 닻을 놓고 있는 것이었다.
비로소 취재를 마치고 묘현스님과 일주문까지 걸어 나왔다.
"스님 은혜로운 취재를 끝냈습니다. 이 보답은 글로 하는 수밖에 없는데, 재주가 모자라 재대로 표현될지 두렵습니다, 부디 저를 위해 염불 해 주십시오. 그 공덕 의지하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는 배웅하는 묘현스님에게 합장을 하고 머리를 숙였다.
"예, 믿음의 의지를 키우세요. 그러면 좋은 기사가 씌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이건 사담이지만 속세에는 없는 일이라 첨언을 드리겠습니다."
그 이야기는 묘현스님의 자신의 가슴에서 불덩이 하나를 내놓는 듯싶었다.
"우리 승방에 한 마리의 고양이가 살고 있어요. 제 법명의 끝자리를 붙여 현이라고 부르며 제가 거두고 있지요. 그런데 그 고양이가 전혀 육식을 하지 않아요. 그러다 보니 어떤 결과가 온 줄 아세요. 털이 빠지기 시작하더니 맨살 가죽의 고양이가 되어 가도 있어요. 조금 전 승방 취재 때 보여드릴까 몇 번 망설이다 그만 두었어요. 보여드리고 싶다는 유혹, 지금도 강하게 느껴요. 그 까닭을 모르겠어요. 어쩌면 이 세상에 육식을 전혀 하지 않는 고양이가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해야 될 일인지도 모르죠."
그는 완료된 기억을 밀치고 전직 승려 묘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고양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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