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Ⅰ] 전국비구니 선원 탐방_② 대둔산 법계사선원
[불기2534(2007년)
작성자
전국비구니회
작성일
2018-06-22 14:21
조회
3358
[기획특집Ⅰ] 전국비구니 선원 탐방
대둔산 법계사선원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경부고속도로를 경유해서 다시 천안 논산 간 민자고속으로 진입, 한참을 달려서 강경·연무IC를 나왔다. 다시 68번 국도를 한 시간 가량을 달리고 나서야 우리는 법계사에 도착하게 되었다.
마침 비가 개여 있었고, 도량은 사찰이라는 전형적인 틀을 벗어난 아파트 형식의 두 건물이 마당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는 스님은 체구가 그리 크지 않으신 스님이셨다. 알고 보니 바로 법계사 주지인 지견스님이셨다.
우리는 스님의 안내로 일단 법당부터 참배하기로 했다. 요사채 옆으로 닦여진 법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약간은 오르막길이어서 겨울에는 어떻게 다닐까? 하는 생각이 언뜻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법당은 밑에서 보는 것보다 올라와서 보니 그 웅장함이 더 했다. 법당 크기가 108평인 것도 있었지만 조각이나 단청 하나하나가 무엇 하나 심혈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 없어 보일 정도로 꼼꼼하고 정교함이 묻어났다. 법당 안에는 삼존불(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는데, 조성하는 데 3년이나 걸렸단다. 그 뒷면에는 탱화를 대신해 삼천불이 모셔져 있었다. 삼천불도 삼존불과 동일한 형태로 배열돼 있는데 아직은 미완성 단계였다. 이 법당은 양각법당이기 때문에 여느 법당보다도 목재가 많이 들어갔단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반가운 얼굴을 뵈었다. 전국비구니회의 부회장을 맡고 계신 자광스님께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법계사 주지스님이 바로 스님의 상좌이기 때문에 여기에 주석하고 계시는 듯 했다.
법당 참배를 마치고 신발을 신는 순간 우리 일행은 법당벽화에 시선이 머물게 되었다. 벽화에서 금방이라도 튀어 나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사찰에 그려져 있는 벽화의 전형적인 틀을 깬 새로운 기법으로 도안이 그려져 있었다. 내용도 천이백 아라한들을 그린 것으로 총 13폭으로 되었는데, 처음 시도되는 것이라서 초안이 없고, 경전의 내용 특히 설화 등을 구상하여 표현을 했기 때문에 기존의 사찰 벽화보다도 다양한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도 그 인물들의 상호가 동일한 것이 없고 하나같이 특색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양각기법이 사용되지 않았는데도 햇빛이 아침에 동쪽에서 떠오를 때 빛을 받으면 벽화의 주인공들이 다 나와서 법문을 들으러 오는 것 같기도 하고, 큰 방에 입선 들이러 오는 것 같기도 하고 , 아니면 공양을 하러 나오시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주지스님의 말씀이다. 어느 곳에서도 시도되지 않았던 새로운 창조기법이 가미된 법당은 웅장하면서도 섬세하고, 장엄하면서도 화려한 창의적인 발상기법이 과거와 현대를 아우르는 듯한 법계사의 이미지와 너무나도 잘 부합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지스님 역시 어떻게 저렇게 자그마한 체구에서 큰 장부의 기상이 넘쳐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너무 서두르지도 않고 너무 느리지도 않게 한 마디 한 마디 하시는 말씀말씀마다 어딘지 모를 힘이 넘쳐 나오고 있음을 느꼈다.
법당 뜰에서 저 멀리 툭 트여 바라보이는 앞산은 마치 겹겹이 소담스럽게 피어 있는 연꽃봉우리와도 같았다. 여기에 앉아 좌선삼매에 들어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일행은 주지스님의 안내로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 입구에 씌어 있는 게송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이 게송이 여기에 거주하는 스님들의 성향을 짐작하게 해 주었다.
“똥간에 오래 앉아 있으면 똥내가 나지 않는다.
향나무 아래 오래 앉아 있으니 향내가 사라진다.”
때마침 날씨가 무덥고 후텁지근한데 주지스님이 여기서 직접 생산한 매실로 담은 차라면서 얼음을 둥둥 띄운 시원한 매실차를 내어 오셨다. 한 모금을 들이키니 시원한 기운이 온몸 가득히 퍼져 금세 더위가 가셨다.
법계사는 1992년에 현재 이 8,000여 평의 부지를 매입하여 그 이듬해부터 불사를 시작, 1997년도에 요사채와 법당 상량식을 하고 정식으로 대중들이 입주를 시작했다고 한다. 각 방의 평수는 11평부터 약간 평수를 달리하여 여덟으로 분류하였는데, 그것은 팔정도를 상징하기 위해서였으며, 방의 총 개수도 우연의 일치로 108개가 되었다는 주지스님의 말씀이다.
그 당시 입주조건은 법랍 15년 이상의 스님에 한해서 입주를 받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큰 무리 없이 지내왔고, 법계사의 대부분 스님들이 선객들이기 때문에 그게 큰 자랑이라고 하셨다. 입주를 받은 그해부터 선방을 개원했기 때문에 11년이 되었고, 현재 방부를 들인 스님은 법계사에 거주하는 스님들로서 40명이고, 사정이 여의치 않아 외부대중은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다고 주지스님은 말씀하셨다.
흔히 요즈음 사회에서 겪고 있는 세대 간의 갈등이 혹시 선방에서도 일어나고 있느냐, 만약에 있다면 어떻게 극복하고 있느냐를 묻는 질문에 입승 자우스님은 전혀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입주 당시에 법랍 15년 이상으로 제한을 해서인지 상·중·하가 적절히 조화돼 있기 때문에 입승소임을 보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으며, 특히 법계사는 어디 종속돼 있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게 큰스님들을 모셔다가 법문을 듣기도 한다고. 또한 송담스님, 혜국스님 등을 찾아가서 법문을 들으면서 공부를 점검해 나가기도 한다고 했다.
교양강좌다 불교대학이다 해서 일반 재가자들이나 사회에 한 발짝 다가서려는 노력이 많이 엿보이는데 선원에서도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어떻게 부합하려고 생각하고 있느냐? 특히나 선방스님들은 자리는 할지언정 타리에 너무 소홀한 것 아니냐는 비평들이 있기도 한데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는 질문에 선원장 자광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우리도 저 위에 큰 방이 하나 있어서 시민선방을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그것이 쉽지만은 않다. 요즈음 5일제 근무에 맞춰서 시민선방을 개원하려고 해도 지역적으로도 그렇고, 내부적인 여러 가지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못하고 있다. 우리 대중들도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단 거주하는 스님들을 불편함 없이 편안하게 모실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 다음에 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다시 “사실 그 말은 곧 한 마디로 수좌가 현 시대에 얼마만한 유익함을 줄 수 있느냐 문제인데, 그것을 이론으로 말하기는 어렵고, 불교 전체를 들어서 말한다면 우리가 견성성불을 했어야 만이 진정으로 중생을 위해서 설법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출가한 지 10년이 될 때까지 신도축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직 나 자신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의 축원을 하나 해서 신도축원을 절대 안 하고 내 발원으로 대신했다. 우리가 ‘수좌가 현시대에 얼마만큼 유익함을 주느냐.’를 말을 가지고 하려면 상당히 어렵다. 그러나 불법의 밑천은 수좌다. 지금까지 불교가 이어진 것은 선에 의해서이지 교에 의해서 이어진 것이 아니다. 때문에 무언무중에 불교의 이력은 수좌가 아닌가.”라고 부언하셨다. 다시금 우리의 자리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또 이어서 말씀하시길 “나는 젊었을 때는 학교를 가라 유학을 가라 하셨지만 3·7일만 닦으면 부처가 된다고 해서 왔다. 평생 살려고 온 게 아니다. 그 당시에 고명하신 선객스님을 알고 지내었는데 3·7동안만 닦으면 부처가 된다는 말을 듣고 있던 중 그 스님께서 결제하러 가신다고 해서 나도 같이 따라 가겠다고 하니까 남자와 여자라서 같이 갈 수 없다고 하셨단다. 그래 스님께서 참선하는 데 남자 여자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하니까. 그래도 굳이 안 된다고 하시면서, 나를 그 당시에 내원사에 계셨던 수옥스님에게로 보내 주셨다. 그래서 머리도 깎기 이전에 먼저 선방부터 앉게 되었는데, 3·7일 공부하러 온 것이 이렇게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웃음 속에 하신 말씀이지만 출가 인연의 지대함과 공부를 향한 젊을 적 스님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그것은 그만큼 견성득도하기가 어려움을 말씀해주시는 것이 아닐까?
선원장 스님께 앞으로 계획에 대해 한 말씀 부탁하니, 여기에는 선랍이 나보다 훨씬 높은 스님들이 많기 때문에 원장이라 하는 것은 가당치 않고, 내 상좌지만 내가 전혀 이 법계사를 짓는 데 개입을 하지 않았고, 처음 짓겠다고 말했을 때 허황된 것이라고 말린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법계사에 관해서는 주지스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는 말씀으로 대변해 주시면서, “그러나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선방이 어디 편안한데 정말 덩그렇게 한옥으로 잘 지어 있으면 평생을 앉아서 정진을 했던 분들이라 움직일 수 있는 날까지 정진을 할 것인데, 현재는 형편이 여의치 않지만 부지도 변변치 않아서 그렇게 못하고 있다. 특별히 정진이란 자리가 안 좋아서 정진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는 모든 면에서 정말 구조가 잘 돼 있다. 항상 대중생활을 하다 보면 마음대로 걸망 하나 내려놓고 쉴 자리가 없는데 여기는 각자 방이 있으니까 조금 쉬고 싶을 때가 혹여 있으면 그렇게 할 수 있고··· 아무튼 이런 시설에서 살면서 죽는 날까지 입·방선 들이지 않는다면 큰 허물이 될 것이다.” 하셨다. 선원장 스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일침을 가하신다.
법계사를 창건하면서나 혹은 그 동안에 일화가 있으면 소개해 달라는 말에 주지스님은 이 사찰을 창건할 때의 일화 한 토막을 말씀해주셨다.
처음 토목공사를 할 때 아랫동네에서 5~6명의 사람이 이유 없이 죽어 나갔다. 아무 이유 없이 밭 매다가 가고, 가만히 집에 있다가 가고, 그 당시 참선을 좀 했답시고 우리들이 어줍잖게 하단을 싫어해서 포크레인 10대가 와서 토목공사를 하느라 산을 헐어내고 있는데도 산신제를 지내지 않았다.
그럴 때 쯤 동네사람이 한 20여 명이 와서 “스님! 제발 좀 살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주지스님이 “살고 싶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하려오?” 하니까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주지스님이 “살고 싶은 사람은 돈을 걷어가지고 가지고 와라.” 하니 며칠 뒤에 한 이백만 원을 가지고 왔다. 그래서 그 이백만 원을 가지고 동네회관에서 재를 베풀되 이백만 원을 들여 재물을 준비하고 절에서 찹쌀 한 가마니를 가지고 떡을 하고 재를 베풀 테니까 살고 싶은 사람은 제일 좋은 옷을 가지고 불전을 가지고 나와라 하니까 그 당시 한 250호 정도 인데 거의 다 나왔다. 큰스님들을 모셔 와서 재를 베풀고 나니 불전이 한 백만 원이 나왔는데 양촌 양로원에 전달해 줬다. 아무튼 그 이후로 탈이 없었다. 그래서 그때 아! 하단이라고 우습게 여길 게 아니구나 깨달으시고 그 이후에 4평으로 산신각을 지으셨단다.
이런 저런 얘깃거리를 뒤로하고 우리 일행은 후원으로 가서 저녁 공양을 했다. 특히 모든 반찬이 다 정갈하고 담백하였다. 차담을 위해 선원장 스님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깨끗하면서도 정갈하게 눈이 부시도록 하얗게 피어 있는 분꽃들은 스님들의 순결하고 맑은 심성을 상징하는 듯이 느껴졌다. 비는 부슬부슬 잦아들고 선원장 스님께서 직접 갈아서 내려 주시는 차의 진한 향기는 온 방안 가득히 퍼졌다. 우리의 마음은 한껏 여유를 부리고 싶지만 시간이 허락지 않는지라 우리 일행은 해가 서산에 기울 무렵에 아쉬움을 남기면서 법계사를 떠나야만 했다
대둔산 법계사선원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경부고속도로를 경유해서 다시 천안 논산 간 민자고속으로 진입, 한참을 달려서 강경·연무IC를 나왔다. 다시 68번 국도를 한 시간 가량을 달리고 나서야 우리는 법계사에 도착하게 되었다.
마침 비가 개여 있었고, 도량은 사찰이라는 전형적인 틀을 벗어난 아파트 형식의 두 건물이 마당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는 스님은 체구가 그리 크지 않으신 스님이셨다. 알고 보니 바로 법계사 주지인 지견스님이셨다.
우리는 스님의 안내로 일단 법당부터 참배하기로 했다. 요사채 옆으로 닦여진 법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약간은 오르막길이어서 겨울에는 어떻게 다닐까? 하는 생각이 언뜻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법당은 밑에서 보는 것보다 올라와서 보니 그 웅장함이 더 했다. 법당 크기가 108평인 것도 있었지만 조각이나 단청 하나하나가 무엇 하나 심혈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 없어 보일 정도로 꼼꼼하고 정교함이 묻어났다. 법당 안에는 삼존불(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는데, 조성하는 데 3년이나 걸렸단다. 그 뒷면에는 탱화를 대신해 삼천불이 모셔져 있었다. 삼천불도 삼존불과 동일한 형태로 배열돼 있는데 아직은 미완성 단계였다. 이 법당은 양각법당이기 때문에 여느 법당보다도 목재가 많이 들어갔단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반가운 얼굴을 뵈었다. 전국비구니회의 부회장을 맡고 계신 자광스님께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법계사 주지스님이 바로 스님의 상좌이기 때문에 여기에 주석하고 계시는 듯 했다.
법당 참배를 마치고 신발을 신는 순간 우리 일행은 법당벽화에 시선이 머물게 되었다. 벽화에서 금방이라도 튀어 나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사찰에 그려져 있는 벽화의 전형적인 틀을 깬 새로운 기법으로 도안이 그려져 있었다. 내용도 천이백 아라한들을 그린 것으로 총 13폭으로 되었는데, 처음 시도되는 것이라서 초안이 없고, 경전의 내용 특히 설화 등을 구상하여 표현을 했기 때문에 기존의 사찰 벽화보다도 다양한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도 그 인물들의 상호가 동일한 것이 없고 하나같이 특색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양각기법이 사용되지 않았는데도 햇빛이 아침에 동쪽에서 떠오를 때 빛을 받으면 벽화의 주인공들이 다 나와서 법문을 들으러 오는 것 같기도 하고, 큰 방에 입선 들이러 오는 것 같기도 하고 , 아니면 공양을 하러 나오시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주지스님의 말씀이다. 어느 곳에서도 시도되지 않았던 새로운 창조기법이 가미된 법당은 웅장하면서도 섬세하고, 장엄하면서도 화려한 창의적인 발상기법이 과거와 현대를 아우르는 듯한 법계사의 이미지와 너무나도 잘 부합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지스님 역시 어떻게 저렇게 자그마한 체구에서 큰 장부의 기상이 넘쳐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너무 서두르지도 않고 너무 느리지도 않게 한 마디 한 마디 하시는 말씀말씀마다 어딘지 모를 힘이 넘쳐 나오고 있음을 느꼈다.
법당 뜰에서 저 멀리 툭 트여 바라보이는 앞산은 마치 겹겹이 소담스럽게 피어 있는 연꽃봉우리와도 같았다. 여기에 앉아 좌선삼매에 들어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일행은 주지스님의 안내로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 입구에 씌어 있는 게송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이 게송이 여기에 거주하는 스님들의 성향을 짐작하게 해 주었다.
“똥간에 오래 앉아 있으면 똥내가 나지 않는다.
향나무 아래 오래 앉아 있으니 향내가 사라진다.”
때마침 날씨가 무덥고 후텁지근한데 주지스님이 여기서 직접 생산한 매실로 담은 차라면서 얼음을 둥둥 띄운 시원한 매실차를 내어 오셨다. 한 모금을 들이키니 시원한 기운이 온몸 가득히 퍼져 금세 더위가 가셨다.
법계사는 1992년에 현재 이 8,000여 평의 부지를 매입하여 그 이듬해부터 불사를 시작, 1997년도에 요사채와 법당 상량식을 하고 정식으로 대중들이 입주를 시작했다고 한다. 각 방의 평수는 11평부터 약간 평수를 달리하여 여덟으로 분류하였는데, 그것은 팔정도를 상징하기 위해서였으며, 방의 총 개수도 우연의 일치로 108개가 되었다는 주지스님의 말씀이다.
그 당시 입주조건은 법랍 15년 이상의 스님에 한해서 입주를 받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큰 무리 없이 지내왔고, 법계사의 대부분 스님들이 선객들이기 때문에 그게 큰 자랑이라고 하셨다. 입주를 받은 그해부터 선방을 개원했기 때문에 11년이 되었고, 현재 방부를 들인 스님은 법계사에 거주하는 스님들로서 40명이고, 사정이 여의치 않아 외부대중은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다고 주지스님은 말씀하셨다.
흔히 요즈음 사회에서 겪고 있는 세대 간의 갈등이 혹시 선방에서도 일어나고 있느냐, 만약에 있다면 어떻게 극복하고 있느냐를 묻는 질문에 입승 자우스님은 전혀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입주 당시에 법랍 15년 이상으로 제한을 해서인지 상·중·하가 적절히 조화돼 있기 때문에 입승소임을 보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으며, 특히 법계사는 어디 종속돼 있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게 큰스님들을 모셔다가 법문을 듣기도 한다고. 또한 송담스님, 혜국스님 등을 찾아가서 법문을 들으면서 공부를 점검해 나가기도 한다고 했다.
교양강좌다 불교대학이다 해서 일반 재가자들이나 사회에 한 발짝 다가서려는 노력이 많이 엿보이는데 선원에서도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어떻게 부합하려고 생각하고 있느냐? 특히나 선방스님들은 자리는 할지언정 타리에 너무 소홀한 것 아니냐는 비평들이 있기도 한데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는 질문에 선원장 자광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우리도 저 위에 큰 방이 하나 있어서 시민선방을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그것이 쉽지만은 않다. 요즈음 5일제 근무에 맞춰서 시민선방을 개원하려고 해도 지역적으로도 그렇고, 내부적인 여러 가지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못하고 있다. 우리 대중들도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단 거주하는 스님들을 불편함 없이 편안하게 모실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 다음에 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다시 “사실 그 말은 곧 한 마디로 수좌가 현 시대에 얼마만한 유익함을 줄 수 있느냐 문제인데, 그것을 이론으로 말하기는 어렵고, 불교 전체를 들어서 말한다면 우리가 견성성불을 했어야 만이 진정으로 중생을 위해서 설법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출가한 지 10년이 될 때까지 신도축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직 나 자신도 어떻게 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의 축원을 하나 해서 신도축원을 절대 안 하고 내 발원으로 대신했다. 우리가 ‘수좌가 현시대에 얼마만큼 유익함을 주느냐.’를 말을 가지고 하려면 상당히 어렵다. 그러나 불법의 밑천은 수좌다. 지금까지 불교가 이어진 것은 선에 의해서이지 교에 의해서 이어진 것이 아니다. 때문에 무언무중에 불교의 이력은 수좌가 아닌가.”라고 부언하셨다. 다시금 우리의 자리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또 이어서 말씀하시길 “나는 젊었을 때는 학교를 가라 유학을 가라 하셨지만 3·7일만 닦으면 부처가 된다고 해서 왔다. 평생 살려고 온 게 아니다. 그 당시에 고명하신 선객스님을 알고 지내었는데 3·7동안만 닦으면 부처가 된다는 말을 듣고 있던 중 그 스님께서 결제하러 가신다고 해서 나도 같이 따라 가겠다고 하니까 남자와 여자라서 같이 갈 수 없다고 하셨단다. 그래 스님께서 참선하는 데 남자 여자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하니까. 그래도 굳이 안 된다고 하시면서, 나를 그 당시에 내원사에 계셨던 수옥스님에게로 보내 주셨다. 그래서 머리도 깎기 이전에 먼저 선방부터 앉게 되었는데, 3·7일 공부하러 온 것이 이렇게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웃음 속에 하신 말씀이지만 출가 인연의 지대함과 공부를 향한 젊을 적 스님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그것은 그만큼 견성득도하기가 어려움을 말씀해주시는 것이 아닐까?
선원장 스님께 앞으로 계획에 대해 한 말씀 부탁하니, 여기에는 선랍이 나보다 훨씬 높은 스님들이 많기 때문에 원장이라 하는 것은 가당치 않고, 내 상좌지만 내가 전혀 이 법계사를 짓는 데 개입을 하지 않았고, 처음 짓겠다고 말했을 때 허황된 것이라고 말린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법계사에 관해서는 주지스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는 말씀으로 대변해 주시면서, “그러나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선방이 어디 편안한데 정말 덩그렇게 한옥으로 잘 지어 있으면 평생을 앉아서 정진을 했던 분들이라 움직일 수 있는 날까지 정진을 할 것인데, 현재는 형편이 여의치 않지만 부지도 변변치 않아서 그렇게 못하고 있다. 특별히 정진이란 자리가 안 좋아서 정진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는 모든 면에서 정말 구조가 잘 돼 있다. 항상 대중생활을 하다 보면 마음대로 걸망 하나 내려놓고 쉴 자리가 없는데 여기는 각자 방이 있으니까 조금 쉬고 싶을 때가 혹여 있으면 그렇게 할 수 있고··· 아무튼 이런 시설에서 살면서 죽는 날까지 입·방선 들이지 않는다면 큰 허물이 될 것이다.” 하셨다. 선원장 스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일침을 가하신다.
법계사를 창건하면서나 혹은 그 동안에 일화가 있으면 소개해 달라는 말에 주지스님은 이 사찰을 창건할 때의 일화 한 토막을 말씀해주셨다.
처음 토목공사를 할 때 아랫동네에서 5~6명의 사람이 이유 없이 죽어 나갔다. 아무 이유 없이 밭 매다가 가고, 가만히 집에 있다가 가고, 그 당시 참선을 좀 했답시고 우리들이 어줍잖게 하단을 싫어해서 포크레인 10대가 와서 토목공사를 하느라 산을 헐어내고 있는데도 산신제를 지내지 않았다.
그럴 때 쯤 동네사람이 한 20여 명이 와서 “스님! 제발 좀 살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주지스님이 “살고 싶으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하려오?” 하니까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주지스님이 “살고 싶은 사람은 돈을 걷어가지고 가지고 와라.” 하니 며칠 뒤에 한 이백만 원을 가지고 왔다. 그래서 그 이백만 원을 가지고 동네회관에서 재를 베풀되 이백만 원을 들여 재물을 준비하고 절에서 찹쌀 한 가마니를 가지고 떡을 하고 재를 베풀 테니까 살고 싶은 사람은 제일 좋은 옷을 가지고 불전을 가지고 나와라 하니까 그 당시 한 250호 정도 인데 거의 다 나왔다. 큰스님들을 모셔 와서 재를 베풀고 나니 불전이 한 백만 원이 나왔는데 양촌 양로원에 전달해 줬다. 아무튼 그 이후로 탈이 없었다. 그래서 그때 아! 하단이라고 우습게 여길 게 아니구나 깨달으시고 그 이후에 4평으로 산신각을 지으셨단다.
이런 저런 얘깃거리를 뒤로하고 우리 일행은 후원으로 가서 저녁 공양을 했다. 특히 모든 반찬이 다 정갈하고 담백하였다. 차담을 위해 선원장 스님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깨끗하면서도 정갈하게 눈이 부시도록 하얗게 피어 있는 분꽃들은 스님들의 순결하고 맑은 심성을 상징하는 듯이 느껴졌다. 비는 부슬부슬 잦아들고 선원장 스님께서 직접 갈아서 내려 주시는 차의 진한 향기는 온 방안 가득히 퍼졌다. 우리의 마음은 한껏 여유를 부리고 싶지만 시간이 허락지 않는지라 우리 일행은 해가 서산에 기울 무렵에 아쉬움을 남기면서 법계사를 떠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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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언] 지난 4년을 회고하며
전국비구니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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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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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사] 한국불교의 미래를 밝힐 등불이 되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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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시Ⅰ] 석굴람 대불大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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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컬럼] 전통사찰, 보존과 홀용의 해법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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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Ⅰ] 전국비구니 선원 탐방_① 내원사 동국제일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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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Ⅰ] 전국비구니 선원 탐방_② 대둔산 법계사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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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Ⅰ] 전국비구니 선원 탐방_③ 법륜사 제일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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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Ⅰ] 전국비구니 선원 탐방_④ 팔공산 백흥암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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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Ⅰ] 전국비구니 선원 탐방 _⑤ 승련사 승련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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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Ⅱ] 국제학술대회 및 법화산림_① 삼장의 재중적 해석에 대한 재고 필요성 / 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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